"이래선 K명품 못 키운다"…'패션 거장' 우영미의 작심토로 [하수정의 티타임]

입력 2023-09-25 00:02   수정 2023-09-25 07:01


우영미 쏠리드 대표는 패션업계에서 마스터(거장)로 불린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패션의 존재감이 전혀 없던 20여 전부터 그는 프론티어 역할을 자처해왔다. 2011년 한국인 최초로 에르메스, 루이비통, 디올 등 럭셔리 브랜드가 속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다. 2020년 한국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명품 백화점인 르 봉 마르셰에서 남성관 매출 1위에 올랐다.

그랬던 그가 또 한 번 역사를 쓴다. 26일(현지시간 기준) ‘글로벌 명품 1번지’로 꼽히는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한국 브랜드로는 첫 매장을 연다. 24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 '우영미하우스'에서 만난 우 대표는 "경영자라기보다 '솔리드 옴므'와 '우영미 파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화려한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니지만, 우 대표는 그동안 겪어왔던 과정을 "지난한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한국 디자이너로 지금의 토대를 만들어내기까지 수 백, 수 천 번 좌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해외에선 열등감을 가졌던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국내에선 한국 브랜드에 대한 역차별과 싸워야만 했다. 우 대표는 "유통 채널에서 받은 홀대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고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한국 브랜드 매장을 툭하면 빼거나 이동시키려 하다보니, 국적을 바꾸면 되냐고 따지기까지 했다"며 "일본처럼 자국 디자이너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해야만 한국도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명품 브랜드를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2년 '우영미 파리'를 파리패션위크에 선 보인지 21년됐습니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파리 첫 패션쇼를 잊지 못합니다. 한국이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국가에서 온 신인 동양인 디자이너가 패션쇼를 한다는데 누가 와서 볼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침 10시30분 좋지 않은 시간대에 관객석은 군데 군데 비어있었지요. '한국에 하이패션(디자이너의 철학이 반영된 고급패션)이 있기나 하겠어'라는 말을 들으며 기가 확 죽었고 열등감에 휩싸였죠.

그런데 그날 패션쇼에 현지 유명 패션지인 '르 피가로' 기자가 앉아 있었던 겁니다. 패션쇼가 끝나고 르 피가로에는 '코레앙 우영미, 그는 신인이 아니다. 지금 바로 매장을 열어라'라는 평가가 실렸어요. "

▷열등감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패션이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존중받았던 파리에 가니 주눅이 들었습니다. 유럽의 역사와 전통에 경외감이 들었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열등감에서 탈피했습니다. 요즘은 파리에 대한 열망이 누그러지고 한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초와 하반기 파리패션위크에서 선보인 2023 가을·겨울(F/W), 2024 봄·여름(S/S) 우영미 컬렉션은 각각 경주와 제주도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내년 2024 F/W 패션쇼에는 서울의 젊은이들을 모티브로 디자인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영미 파리' 대신 '우영미 서울'이란 로고를 티셔츠나 모자에 새기고 있어요. 유럽인들이 열광하고 있지요. 20년동안 해외에서 싸워보니 이제는 확신이 섰습니다. 한국은 자긍심을 가져도 됩니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기본 자질과 속도, 좋은 취향이 결합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한국인처럼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기 쉽지 않아요. "

▷우영미 브랜드 자체가 경쟁력이 있는 것인데 파리에서 인정받았다고 박수치는게 어찌보면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겠네요.
"파리패션위크에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이 아니면 좋은 장소나 시간을 잡기가 어렵지요. 정회원이 되려면 심사위원회의 여러 심사를 거쳐야 하고 전통 럭셔리 하우스들이 받아주어야 하지요. 한마디로 같은 레벨인지 따져본다는 겁니다. 그래도 이 단체는 공정성이라는 신뢰를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기준을 지켜왔지요. 전세계 디자이너들이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는 이유입니다. 신뢰라는 것 때문에 파리의 패션 시장이 경쟁력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6일 파리 생토노레에 플래그십 매장을 개점하는데요. 그 의미를 소개한다면.
"생토노레는 세계 럭셔리 브랜드의 최고 격전지입니다. 한국 브랜드가 생 오노레 거리에 단독 매장을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1.6㎞가량 이어진 거리는 에르메스, 샤넬, 생로랑 등 고급 디자이너 부티크부터 하이엔드 주얼리 매장, ‘만다린 오리엔탈’, ‘코스테’ 같은 유명 호텔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유명세만큼 입점이 까다롭습니다. 2년 이상의 준비 기간과 건물 입주민 전체의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건물주가 패션쇼에 직접 와서 브랜드 위상을 점검하고 인터뷰해서 이를 통과해야만 입주가 가능하지요. 인근에 있는 다른 브랜드 매장과의 합의도 필요합니다. 최고 럭셔리 브랜드의 쇼케이스장인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면 한국 패션이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명품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비싸다고 모두 명품은 아니지요. 해외 럭셔리 브랜드라고 다 명품이 아닙니다. 명품은 만든 사람의 영혼이 들어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성스럽게 만들어져서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것, 애지중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이지요."

▷한국은 국민 1인당 명품 소비 1위 국가라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한국 명품 브랜드는 많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우영미 브랜드는 백화점 명품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싸워서 쟁취한 것 입니다. 불과 몇 년전만해도 이러지 않았어요.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틈만 나면 한국 브랜드의 매장을 빼거나 이동시켰죠. 그야말로 구박과 홀대를 받았습니다. 유통채널의 상품기획자(MD)도 해외와 국내가 나뉘어 있습니다. 명품관은 주로 해외MD가 맡지요. 오죽하면 국적을 바꾸면 인정해주겠냐고 따지기까지 했어요. 그나마 우영미 브랜드는 매출이 나오니 싸울 힘이 있었지요."

▷일본은 자국 디자이너를 보호하는 문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패션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선배 디자이너가 앞으로 나아가야 후배가 길을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일본은 레이 가와쿠보(꼼데가르송),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라는 3대 디자이너가 일본 패션산업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유통채널이 이들을 지원해주고 자국민들은 이들을 아껴줍니다. 일본 내에서 3대 디자이너들이 역량을 다져 해외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패션 토양이 빈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은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세계 무대에서 홀로 전쟁을 치러야하지요."

▷대기업이나 자본과 손 잡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나요.
"무수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국내 대기업도 많았고 중국은 셀 수도 없지요. 미국, 독일, 프랑스, 홍콩 등에서 투자를 하겠다는 러브콜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들이 우영미 브랜드를 입양해 잘 키울 수 있을지 장담이 안됐어요.

하이패션은 아이 키우듯 천천히 시간을 주며 성장을 지켜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겨우 기기 시작한 아이를 뛰라고 요구하는 게 자본의 속성일 수 밖에 없지요. 언젠가 제가 능력이 없어지면 누군가에게 넘겨야 하겠지요. 조건은 자식처럼 잘 키울 수 있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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